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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내 먹는 인생영화

바다가 들린다 : 서툴렀던 우리의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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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린다

 

1993년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바다가 들린다>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지브리스튜디오의 작품입니다.

작품 자체는 생소하지만, 주요 장면 장면은 인터넷 밈(meme)으로 많이 사용되어 익숙할 것입니다. 저도 작품을 본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아, 이 장면이 이 작품의 장면이었구나.' 하며 반가워했으니 말입니다.

 

지금의 지브리스튜디오 주요 작품들과는 조금 결이 다르지만, 개인적으로 아주 신선하게 본 애니메이션입니다. 

특히 1990년대 분위기와 감성을 사랑하는 저에게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조차 알아차리기도 전에 시작되어버린 그 시절 첫사랑의 감정과 제대로 표현할 수도 없었던 그 서툰 마음들이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작품인데요. 너무 서툴러서 오히려 원수같이 대하고마는 애송이 같은 주인공들의 모습에, '아이구, 얘들아, 왜 그러니...' 소리가 절로 나오기도 합니다.

 

아마 주인공들의 또래였을 때 이 영화를 봤다면 주인공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 보니 모두의 마음이 너무도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투명합니다.

 

<바다가 들린다>의 그 남자 '타쿠'와 그 여자 '리카코'의 입장이 되어 이들의 마음을 좀 들여다 보겠습니다.

 


 

"다 필요없어, 내가 세상을 등진 거야!" - 잘나도 너무 잘난 그 여자 '리카코'

리카코는 참지 않지

 

영화를 보기 전 유튜브 영화리뷰 채널에서 <바다가 들린다> 리뷰를 본 적이 있는데, 리카코에 대해 '지브리 여자 주인공 중 성격 제일 이상한 애', '정말 이해 안 가는 애'라는 댓글이 굉장히 많이 보였습니다. 

리카코는 확실히 한 번에 이해되는 성격의 소유자는 아닙니다. 도쿄에 살던 깍쟁이 같은 리카코는 고치현 고치시로 전학을 오자마자 화제의 중심이 됩니다. 운동도 잘하는 애가 전학 오자마자 치른 시험에서도 12등을 해버립니다. 거기다 얼굴도 예쁘다니... 말 그대로 '사기캐'입니다. 여학생들은 그런 리카코를 질투하며 뒤에서 있는 소리 없는 소리 해대고, 남학생들은 완벽한 리카코에게 관심이 많지만 너무 완벽해서 쉽게 말도 붙이지 못합니다.

 

리카코는 자신을 향한 관심들을 알고 있지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신경 쓰지 않는 걸 넘어서 학급 일에 참여도 하지 않고 친구도 만들지 않습니다. 잘나도 너무 잘나서 아주 세상에 자기 혼자만 있는 듯이 굽니다.

 

그런 리카코가 수학여행에서 타쿠에게 다짜고짜 돈을 빌리는 것도 쉽게 이해는 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닌 타쿠에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돈을 빌립니다. 진짜 얘 뭐죠?

 

너무 잘났지만, 너무 이상한 리카코를 이해하게 되는 시점은, 타쿠와 도쿄로 동행하게 되면서부터입니다. 

리카코가 왜 타쿠에게 돈을 빌리면서까지 도쿄에 가야 했는지, 리카코가 왜 전학 간 학교에서 자기 혼자만 사는 애처럼 굴었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합니다.

 

아, 이 도쿄여행에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포인트!

물론 얼떨결에 함께 가게 된 도쿄였지만, 리카코는 왜 순순히 타쿠와의 동행을 수락했을까요? (하하)

 

리카코의 부모님은 이혼을 했고, 그러면서 리카코는 엄마를 따라 고치시로 이사를 오게 된 거였습니다. 도쿄에 있는 아빠, 친구들과 갑자기 헤어지게 된 건 물론이고, 도시에 살던 리카코가 갑자기 시골에 살게 됐으니 적응하기도 쉽지 않았겠지요. 무엇보다 여러모로 민감한 나이에 부모님의 이혼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 

아빠가 그리워 거짓말까지 하며 온 도쿄에서, 자신의 방은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고 아빠의 새로운 여자 이야기까지 듣게 되면서, 오히려 상처만 깊게 받게 됩니다.

 

그렇게 상처를 받고 타쿠가 묵는 호텔로 돌아온 리카코는 타쿠의 품에 안겨 울다가 잠들고 맙니다. 잘난 척하던 리카코가 처음으로 누군가의 앞에서 조금은 솔직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전 남자친구와 만나는 자리에 보란듯이 타쿠를 불러 타쿠를 바보 만드는 걸 보면서 '역시 리카코구나' 싶었습니다. 리카코가 전학 가자마자 리카코의 친한 친구와 사귄다는 전 남자친구 앞에서 기죽기 싫어서 타쿠를 불렀는데, 타쿠도 리카코도 조롱만 당하고 맙니다. 타쿠는 본인을 바보 만든 것도, 그런 놈에게 조롱당하면서도 진짜 표정을 숨기고 웃던 것도 모두 화가 납니다.

 

그 순간 리카코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아빠도, 친구도, 진짜 내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느끼진 않았을까요? 사춘기 소녀의 유리같은 마음은 산산이 부서져 뾰족한 조각을 세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리카코가 어느새 시작된 사랑을 눈치챌 여유따위 없었던 건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겠지요.

 

 


 

"지나고 보니 사랑이었더라." - 너무 늦게 알아버린 그 남자 '타쿠'

굳이 욕조에서 자는 타쿠

 

'타쿠'는 좋은 사람입니다.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에는 앞장서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친구와의 의리도 있는 18살 소년입니다. 하지만 타쿠는 전학 온 이상한 여자애 리카코를 만나고부터 별일을 다 겪게 됩니다.

수학여행에서 돈 잃어버렸다며 돈 좀 빌려달라는 리카코에게 거금을 빌려줬더니, 알고보니 거짓말이었답니다. 화가 나서 따졌더니 도리어 따귀를 맞았습니다.

그 이상한 여자애랑 어쩌다 도쿄까지 같이 가줬더니 이번에는 자기가 사귀었던 전 남자친구 앞에서 자기들끼리만 아는 얘기를 하며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을 합니다. 전학 가자마자 자기랑 제일 친했던 친구와 사귀고 있다는 놈 앞에서 실실 웃기만 하는 그 애를 보니 더 화가 납니다. 왜인지 모르지만 화가 납니다. (타쿠만 모르고 우리는 아는...)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가 우연히 학급 여학생들이 리카코를 둘러싸고 '왜 학급 일에 참여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걸 듣게 됐는데, 혼자서도 할 말 다 하는 리카코에게 "너 정말 굉장하더라. 애들이 그렇게 몰아세우는대도 기죽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울리다니, 진짜 놀랐어." 라고 했더니 다짜고짜 또 따귀를 때립니다. 타쿠는 너무 황당합니다. '나 왜 맞은 거야?'

 

가장 친한 친구 '마츠노'가 리카코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어떤 애인지 지켜본 것뿐인데 왜 이렇게 애랑 자꾸 엮이는 건지, 타쿠는 도무지 이 아이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네, 타쿠는 참 둔한 18살 소년이었던 겁니다. 어느새 시작된 사랑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물론 헷갈린 순간들은 있었을 겁니다.

 

함께 도쿄에 갔을 때, 상처 받고 호텔로 돌아와 자신의 품에 안겨 울던 리카코에게 말없이 품을 내어줬을 때, 침대에서 잠든 리카코를 배려해 욕조에서 잠을 청하던 그날 밤에도...

 

하지만 내 친구가 좋아하는 아이고, 무엇보다 리카코는 타쿠에게 친절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삐걱대기만 할 뿐이었죠.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어렴풋이 알게 될 즈음 졸업을 했고, 대학생이 된 타쿠가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리카코와 닮은 여자를 보게 되면서 그제서야 깨닫게 됩니다. '역시 난 그 애를 좋아했었다'는 걸 말입니다.

 

내 마음이지만 나도 모르는 그때의 그 서툰 감정들을 눈치 없는 타쿠를 통해 오랜만에 떠올려봅니다. 너무 서툴렀지만 그래서 더 아련하고 웃음이 나는 첫사랑의 기억입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은 바로...욕조에서 자는 사람이야

- 대학생이 된 리카코의 대사

 

 

 

나조차 감당할 수 없던 그 복잡미묘한 수많은 감정들에 서툴 수 밖에 없었던 풋내기들의 첫사랑을 담은 졸업앨범 같은 애니메이션, <바다가 들린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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